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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물이 드는 날
운영자 2024-12-14 추천 1 댓글 0 조회 88

 

 

우리도 물이 드는 날

이시준 장로

 언제 그리 무덥던 날이 있었던가, 사람의 체온을 넘나드는 무더위가 계속되었던 날이 엊그제 같았는데, 이제 아침과 저녁에는 찬 바람이 분다. 창조주가 망각이라는 선물로 지난날의 짜증도, 무더운 날씨도, 메말라가는 대지의 고통도 다 잊고 기억에서 사라지게 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가을비가 내린다. 나무 잎새에도 뜰 안 텃밭 배추 잎새에도 빗소리가 요란하지 않게 속삭이듯 살포시 내린다. 마음까지도 차분해진다. 한동안 목말라던 대지가 기다렸다는 듯이 아주 흡족하게 받아들인다.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싼 며느리 봉이며 국사봉에도 어느새 가을이 깊숙이 들어왔다

 삼면으로 둘러싸인 소나무 숲 사이에 참나무, 떡깔나무, 단풍나무 등 활엽수들이 군데군데 자리하고 있다. 계절의 변화를 실감한 듯 잊혀지길 두려워하는 노년의 얼굴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고운 빛깔은 어디로 갔는지 마치 세탁하지 않은 채 봄부터 여름 내내 입던 헤지고 탈색된 잿빛 톤의 옷으로 가을맞이를 한다. 곱고 고운 자태의 모습은 오 간데없고, 붉고 화려한 색동 옷 대신 우중충한 옷으로 길손을 맞는다.

 아침에 일어나니 돌담에서 떨어진 담쟁이의 빨간 단풍이 비에 젖어 도로에 처량하게 뒹굴고 있다. 시인 도종환은 단풍드는 날을 이렇게 표현한다.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放下著), 제가 키워 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산야를 장식했던 녹색 청춘은 반쯤 말라비틀어지고 강한 열기로 타버린 기형적인 색조로 자연의 화폭은 생기를 잃었다. 가을이 오면 식물의 잎은 일교차로 인한 생리적 변화를 일으키고 초록색 잎이 바래고 퇴색의 계절로 바뀐다. 유감스럽게 올해 단풍은 안타깝게도 이상고온과 가뭄, 일조량의 변화로 갈라지고 터지고 말라버려 향기마저 떠났다

 질곡, 아픔, 세월의 무게와 함께 보낸 결과였으리.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채색하지는 못했어도 한 생애를 마치고 주어진 임무를 마무리한다. 자신을 빛내준 나무를 향해 천 조각이 되고, 이불이 되어 뿌리를 덮는다. 비 내리는 날 숲속을 걸어보라, 청빈의 나목에, 모든 것을 내려놓음을 실천한 낙엽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함께, 땅속 생명의 숨소리를 들어봐라

 나도 한때 늙지 않을 푸른 계절이, 윤기 나고 풍성했던 시절, 때론 하늘을 향해 힘껏 솟아오르고, 날고픈 꿈의 순간이 있었음을 외치는 그들의 아우성을 들어 보라, 겨울 지나 봄에 부활을 꿈꾸며 마지막 잎새는 바람 따라 허공으로 오르며 시야에서 멀리 높이 자취를 감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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